동북은 북으로 기나긴 흑룡강, 동으로 우쑤리강,남으로는 압록강 황해,서로는 대흥안령산맥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한반도의 4배쯤 되는 넓은 땅이다. 료하와 송화강이 동북의 복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고 이 강가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이 펼쳐져 있다.이곳 동북의 들판과 산악 곳곳에는 일제에 맞서 싸웠던 우리민족의 항일운동의 발자취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이 동북에 조선족들은 언제부터, 왜 와서, 어떻게 살았는가.
청나라는 동북를 청조의 발상지라하여 신성시하고 오랫동안 한족과 조선족이 드나드는 것을 막았다.그런데 1870년경 북부 조선 일대에 흉년이 들었다.이곳 농민들은 앉아서 굶어죽으나 동북가서 잡혀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동북 땅에 들어가 땅을 일구었다. 이들이야말로 맨 처음 동북에 옮겨 산 사람들이었다.
그뒤 동북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났는데 한일합방을 계기로 그 모습이 이전과는 달랐다.일제시대 때 조선족이 이주하는 까닭은 크게 보아 일제가 심하게 착취해서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조선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을 한답시고 마구 토지를 빼앗아가 소작지마져 구하기 어려운 처지였다.몰락한 농민들에게 땅이 넓고 기름지며,인구가 적은 동북는 희망의 땅으로 비췄다.
동북으로 가는 이주민은 대개 늦가을에 고향을 떠났다. 그 이유는 곡식을 키울때는 날품이나마 팔아 끼니를 때울 수 있었지만 늦가을에는 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주민들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주는대로 받고 팔아 생긴 돈으로 기차나 배로 고향을 떠나 동북으로 갔다.동북에 내릴 때부터 이들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영하 40도나 되는 매서운 추위속에서 10-50명씩 떼를 지어 산비탈을 기어 넘어가는 흰옷 입은 말없는 군중,바지를 걷어올리고 맨발로 어름장 섞인 강물을 건너가 저편 언덕에서 바지를 나리우고 신을 신는 조선족 남자,이곳 저곳 몸을 드러낸 채 아기를 등에 엎고 걸어 가는 남루한 옷차림의 조선족 여인의 모습은 동북 어디서나 흔했다.
먼저 와 있는 조선족 집단 거주지에 가서 얹혀 살게 되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이주민은 중국인 지주의 소작인이 되거나 농장 노동자가 되었던 것이다.처음부터 "당신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계약을 맺어 고통도 클 수 밖에 없었다.이들은 중국인 불모지 땅을 괭이질 호미질하여 옥토로 가꾸었으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댓가는 너무 적어 살아가기 어렵기는 조선에서나 마찬가지였다.이주민 가운데 많은 사람이 얼어죽고 굶어죽구 병에 걸려 죽었다.
일제가 동북 침략할 때 동북에 사는 조선사람을 동원하자 이들은 더욱 힘든 처지가 되었다.일제는 자신들이 쫓아낸 것과 다름없는 이주민을 동북에까지 따라와 이제는 '일본 신민'이라고 우기고 돌보겠다고 하며 조선족이 하는 일을 하나하나 간섭하고 나섰다. 그들은 '일본 신민'인 재만 조선족을 자기들이 다스릴테니 이들에 관한 치외법권을 인정하라고 중국 정부에 강요하였다.이러한 협박은 중국에게는 커다란 주권침해였으며 중국인의 자존심을 크게 깎았다. 중국인은 조선족을 점차 귀찮게 생각했다.심지어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는데 조선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여기고 조선사람에게는 조선족에게는 토지 소유권을 허가하지 않는 등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탄압하고 나섰다.
조선족 중국인 민중간에 갈등이 점차 깊어졌다. 두 민족의 갈등은 길림성 장춘 부근 조선 농민을 중국인들이 습격한 만보산 사건(1931.5)으로 폭발되었다. 만보산 사건에 자극받은 국내 조선족들은 중국인 교포들을 습격하여 72명이나 때려죽였다. 조-중 민중 사이의 대결은 일제가 손꼽아 기다려 왔던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족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적극 간섭하고 나서 1931년 9월 18일 마침내 군대를 풀어 전 동북를 점령하였다.
일제는 동북을 식민지로 확고히 굳히려고 이곳에 조선족들을 집단이주시키고자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선만척식회사를 세워 조선족 동북 이주 사업을 맡겼다. 중일전쟁이 터진 뒤 이민 사업을 더 다그쳐 총독부는 해마다 5만명씩 20년에 걸쳐,100만명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이를 실현하려고 총독부는 각 도 군에 강제로 할당하여 이민을 모집하였으며 동북 풍요한 들판을 담은 무성영화를 전국 방방곡곡에 상영하여 동북이주를 충동하였다.그럴싸한 꾀임에 빠져 이주하는 조선족은 늘어 1933년에 67만여명이었던 조선족 수가 1939년에는 116만,1941년에는 150만이 되었다.
속아서 동북으로 이주해온 조선족들은 북동북의 외딴 곳에 배치되었다. 그들이 당하는 고초는 말할 수 없었다. 학교도 병원도 없고 심지어 살 집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이곳에 버려진 이주민들은 속았다고 뉘우쳐봐야 소용이 없었다.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도,돌아갈 여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 조선족들에게 자못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이 조선족들이 황야를 개척하여 논으로 만들어 쌀을 생산하여 100만 재중국 일본군의 식량을 대주길 바랬다. 또 소련과 전쟁이 터지면 현지에서 소련군에 맞서 총알받이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였다.그러자면 조선족들을 '황국신민'으로 세뇌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제는 먼저 이주민이라는 용어를 금지하고 대신 개척민이라는 딱지를 붙여주어 이주민들에게 쓸모없는 자부심을 부추기고,국내에서 이름을 날리던 문인,연예인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개척인의 밤'을 열어 달래기도 하였다. 일제는 특히 이주민을 이끌 지도층의 황국신민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지도층으로는 '동북 개척민 지도자'.'중견분자'.'청년의용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일제가 뜻하는대로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도처에서 일제에 맞서 저항하였다. 더구나 일제가 망한뒤 이들은 동북에 깊이 뿌리내린 일제 잔재 척결에 앞장섰다.
국내로 돌아 온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현재까지 동북 각지에 머물러 중국 국민으로 살고 있다. 1954년에는 두만강 맞은편 북간도 지역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되었다. 이 자치주의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연길시에 설립되어 있는 연변대학은 이 자치주의 교육의 중심지이자 재만 조선족의 문화 교육의 구심 역할을 다해오고 있다. 따라서 현재도 재만 조선족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습과 언어를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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