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과 병마용
진시황은 기원전221년에 10년간의 겸병전쟁을 통해 크고 작은 제후국들을 정복하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이 넓고 민족이 많으며 통일된 중앙집권 봉건왕조를 걸립했다. 그는 스스로<시황제>라고 칭했다.
진시황은 황제의 보좌에 오른후 얼마 안되어 현 섬서성 서안시 림동 려산 북쪽에 자기의 릉묘를 수건하기 시작했다. 묘지는 산을 등지고 강물과 면한 풍수가 아주 좋은 곳이였다. 릉원은 내외 두개 성으로 나뉘었는데 지상 건축은 이미 사라졌다.
릉묘는 수건시 높이가 120미터, 부지의 둘레의 길이가 2167미터였다. 2천여년의 풍습과 파괴를 거쳐 현재 릉묘의 높이는 76미터, 부지의 둘레의 길이는 2천미터로 되었다.<사기>의 기재에 따르면 [릉묘는 축수층까지 깊이 팠고 상층은 견고화시켜 관을 놓을수 있으며 묘실벽에는 일월성신과 산천지형도가 그려져 있고 묘중에는 관저와 백관위차가 세워져 있으며 진귀한 진주와 보물로 가득찼으며 고분의 인어 기름으로 만든 등잔불이 켜져있으며 많은 암살무기들이 중요한 곳들에 설치되어 있어 수시로 도적들의 침입을 막을수 있다.>
2천여년의 역사적인 부식은 진시황릉의 최초 규모를 줄여놓았지만 오늘도 여전히 황제릉의 기백을 과시하고 있다. 1974년 중국 문화재 고고학 사업자들은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1.5키로미터 되는 곳에서 세개의 대형 병마용 구덩이를 발굴해 냈다. 이 세 구덩이는 도합 2만여평방미터로서 도자기로 된 병사와 말 거의 8천점과 목제 전차 100여대, 청동병기 4만여점이 있었다.
웅장한 군사진영은 사람을 놀랍게 했으며 더욱 사람을 놀래운 것은 출토된 이 6천여점의 병사 도자기용이 진짜 사람모양 크기이고 얼굴모양이 하나도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로 공예 걸작이 아닐수 없었다. 진시황릉에서는 또한 동으로 된 차, 동으로 된 말과 많은 절세의 진귀한 보물들도 발견해 냈다.
진시황릉은 1987년<세계문화유산명록>에 수록되었다.
진시황제릉의 병마용갱. 1974년 한 농민이 지하 궁전을 발견하여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킨 진나라 때의 지하 대군단으로 20세기 최대 고고학상의 발견이다.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인 진시황 병마용은 진시황릉을 중심으로 약 2킬로미터 사방에 지하에 건설된 지하 궁전의 일부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 궁전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죄인 70여만 명을 동원, 사후를 위해 만든 것으로,지하수가 세 번 나올 정도로 깊이 땅을 판 후 동판을 깔고 관을 안장했다. 지하 묘에는 궁전, 망루와 문무백관의 자리를 만들었고,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자동 발사되는 활을 장치해 살해했다. 지하 궁전은 계속 발굴 중인데 병마용 갱은 너비60미터 길이 2백 10미터이며 지표면으로부터 4.5미터의 땅속에 판 10개의 갱마다 병마가 10열로 서 있다. 전차대, 포대 그리고 쇠뇌와 화살을 가진 보병대가 있는데, 이들 병사들의 표정은 모두 다르고 그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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