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 상품이 중국산의 비단이었던 데에서 유래하는데 서방으로부터도 보석·옥·직물 등의 산물이나 불교·이슬람교 등도 이 길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이 통상로에는 타클라마칸사막의 북변을 통과하는 서역북도(西域北道)와, 남변을 경유하는
서역남도(西域南道)가 있다. 똑같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西)투르키스탄의 시장에 이르며, 또한 동방으로는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煌]에서
합해져 외길로 되어 황허강[黃河] 유역까지 이르렀다.
다만 초기의 것은 둔황의 서방에 위치하는 로브노르의 동단(東端)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북도는 후베이[湖北]의 누란(樓蘭), 남도는 후난[湖南]의 미란을 경유하여, 두 오아시스를 국제시장으로 번영하게 하였다. 그러나
3세기경부터 로브노르 일대의 건조화(乾燥化)가 진행되면서, 북도는 둔황에서 북행하여 톈산산맥[天山山脈]의 동단, 투루판분지[吐魯蕃盆地]를
경유하여, 카라샤르[焉耆]·쿠차[龜玆]·카슈가르[疏勒]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로브노르의 남안을 서쪽으로 향하여 우전[于闐]에
이르는 남도는 점차 이용도가 낮아졌다. 그 때문에 당(唐)나라의 서역경영은 제2차의 서역북도에 따라 행하여졌으며, 후대에 톈산남로[天山南路]의
호칭이 생기게 된 것도 같은 서역북도였다.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사막의 주변에 산재한 다수의 오아시스 나라들의 대상활동으로
유지되었으며, 그 무역의 이익은 동방에서 중국인을, 북방에서 유목민을, 또 남방에서는 티베트인을 끌어들여 그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와 같은 외부세력에 의하여 시장이나 상로를 독점하려는 군사적 진출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의 형세를 좌우할 만큼 되어
있었다. 이 길의 동방과의 연결은 BC 2세기 후반의 한무제(漢武帝) 때라고 하지만, 그보다 2세기 앞서서 이미 동서의 교섭이 있었던 증거가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한대(漢代) 초기에 걸쳐 간쑤성 서부를 점거하고 있던 월지(月氏:禺氏)가
비단의 중계무역에 종사하였기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서역의 옥(玉)이 월지의 중계로써 활발히 중국으로 수입되었고 이것을 중국인이 우씨(禺氏)의
옥이라고 부른 데에서 추측된다. 그 옥의 대가로서 당연히 비단의 수출을 생각하게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동서무역은, 한무제 때에
이르러 크게 조정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장건(張騫)이 서역으로 특파(BC 139∼BC 126)된 것을 계기로 하여 처음으로 서방의 사정이
공적 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역대의 왕조는 동서의 무역에 열의를 나타내어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여러 오아시스 나라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서방의 물건이 활발히 중국으로 도래하였으며 서방의 문물, 특히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마니교 및 로마에서 이단시(異端視)되었던 그리스도교의 한 파인 네스토리우스파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7세기 중엽 당나라가 타림
분지에 안서도호부(安石護府)를 설치한 무렵은 실크로드의 최성기(最盛期)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고(755),
티베트군의 진출로 당나라와 서역과의 직접적인 교섭이 단절되자, 서역 동부는 위구르인(人)이 점거하고 고대부터의 문화를 계승하였으나 서부에는
이슬람 세력이 진전하고 있어서 실크로드는 중간의 파미르 근처에서 중단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이 결국 정치적으로 투르키스탄이 동서
2분으로 연계되어 오늘에 이른다. 또한 중국의 비단을 서방으로 운반한 점을 중시한다면, 실크로드가 점하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이란이나 지중해
연안까지 연장되기도 하고, 북아시아의 유목민을 매개로 하는 스텝지대를 관통하는 교역로(스텝 루트)나 남방의 남해제국(南海諸國)을 매개로 하는
해상교역로(시 루트)를 포함해야 한다.
중국내 실크로드 여행지는 보통 '서안' - '난주'- '주천' - '돈황' - '투루판'
- '우루무치' - '쿠차' - '카스'가 여행코스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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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는 2천년 전부터 중국의 장안과 로마를 잇는 무역항로를 말한다.
모두가 매료되는 실크의 감촉을 유럽사의 절반을 차지하는 로마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무역항로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카레즈 - 빙하들이 그렇듯 푸른 옥빛을 띄고 있다.
물이 건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하수로를 만듬.
첫째로, 그 원천기술을 중국이 엄격히 제한하여 공급물량을 조절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둘째는, 로마가 소비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물류. 즉, 유통경로와 과정이 극도로 어렵기 때문에 목숨을 담보로 높은 물류비용을 챙겼을 것이다.
둔황에서 카슈카르, 사마르칸트, 테헤란을 잇는 육로는 모두 본것은 아니지만,
지금 국제적 정세를 제외하더라도 그 물류비용을
엄청나게 요구할 것은 분명하다.
키질 천불동 전경
키질 천불동 앞 오아시스
위그르 여인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불을 껐다는 화염산
타클라마칸 사막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서해클래식)에서 '롭(타클라마칸을 지칭) 사막의 유령'으로 대낮에서 유령이 나타나 사람들을 유혹하여 죽음으로
몰고 간다고 아주 재미나게 표현해 두었다.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무리와 떨어져서 방향을 잃고 죽게된다거나, 밤에 그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무리에서 벗어난 사실을 뒤늦게 알고 굶어죽는 등..
스벤 헤딘 (100여년 전에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한
스웨덴인)이 낙타의 목에 달린 종소리를 들으면
마치 장례식장으로 가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고 회상한 것도 결국 낙타들이 흩어져도 다시
쉽게 모일 수 있기 위한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 이전에 바다였기에 아직도 소금기가 남아 있다
위그르 어로 '돌아올 수 없는 사막'이라는 의미의 타클라마칸 사막
타클라마칸 사막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륜구동뿐만 아니라 험비와 같은 High-End급 동력도 무용지물처럼 느껴진다.
겨우 100m
벗어났을 뿐인데..
나노기술로 만들어진 그 어떤 배도 남극의 얼음바다를 헤쳐나가지 못하고
오직 물개나 고래의 가죽으로 만든
원주민의 가약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곳도 인내심이 가장 강한 낙타만이 가능할 것이다.
천산대협곡
이 땅에 무슨일이 있었는가 장엄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도데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붉게 타오르는 협곡들은 타클라마칸 사막 윗쪽의 천산산맥의 일부분일 것인데
그나마 안전하다는 천산북로로 카슈카르로
향했다면, 도데체 타클라마칸 사막은 얼마나 위험한 것일까
물론, 이곳의 지형은 험하지만 곳곳에 물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일부는 아직도 물이 흐른다.
그 물줄기를 따라 방목된 낙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둔황에서 길고 긴 실크로드 여정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서 굴을 파고 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들 그랬을 것이다. 불교도건,
회교도건..
둔황-막고굴 (Mogao Caves, 1987년
지정)
막고굴은 1987년 중국에서 가장 먼저 지정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실크로드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역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화, 인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모두 492개의 동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 1천년간 지속된 예술활동으로 불교
미술의 성지로 불리운다.'
막고굴 외부벽화
막고굴의 문화가 화려할 수 있었고, 오랜시간을 두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서양의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후원자들. 즉 대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높이 30여 m 에 이르는 불상은 대상들이 하룻밤을 지낸 여인에게 수천필의 비단과 수백마리의
낙타를 지불했다는 것이 어쩌면 허풍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막고굴 외부
막고굴은 어느 책에서나 스벤 헤딘의 탐험에서 촉발된 서양의 약탈자들에 대해서 깊게 다루고 있다.
아마도, 탐험가들 대부분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약탈자들의 기행이 더욱 독자의 흥미를 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도둑놈'이라는
표현을 강조한 것으로 미루어 중국인들에게는 스타인과 펠리오는 무자비한 약탈자임이 분명했다.
이 부분에서 중국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우위의 중국문화기행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들이 연구할 능력이 없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선 자리를 찾고 함께 앉아 서로의 학문 수준을
비교해 보고 싶다. 무엇이든 좋다.
오직 선조들이 우리들에게 물려준 유산을 몰래 훔쳐가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동굴에서
발굴한 문헌 일부가 경성으로 보내진 것은 사실이었다.
나무 상자도 없이 그저 자리에 둘둘 말려서, 가는 길에 관리들이 닥치는 대로 한
묶음씩 가져가고..
차라리 런던 박물관에 두는 게 낫겠다고 악에 받친 말이라도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그저 사막 한가운데 서서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타클라마칸의 모래바람
실크로드는 독점적으로 누리던 실크제조기술이 퍼져나가고,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실크로드가 최근들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단순한 물류를 넘어 실크로드를 따라 매장된 1차산품들이 그 주요 원인이다.
구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무렇게나
그어진 국경은 아직도 많은 종교적, 민족적 갈등이 숨쉬고 있다.
아무튼, 여러 이유와는 별개로 서방은 서둘러 투자를 하고, 중국은
100년 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한발 뒤로 물러난 느낌이다.
둔황 - 명사산
둔황 - 명사산과 월아천
2천년전 실크로드 대상 행렬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우루무치 시내 전경